공덕귀는 1911년 4월21일 경남 충무(지금의 통영)에서 대한제국 군인인 공도빈씨와 방말선(공마리아)씨의 5녀 2남 중 둘째딸로 태어나고 성장했다. 35세에 혼자된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녀들을 키워냈고, 공덕귀에게는 용감하고 자랑스런 어머니였다. 공마리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호주 선교사들과 성경 공부나 찬송을 배우는 등 교류가 많았으며 동네 여인들은 그의 성경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된 일이 있고, 재건교회를 세워 장로로서 일생 주님을 위해 일했다. 공덕귀는 믿음의 여장부인 어머니의 뒤를 밟으며 호주선교회와 더불어 학창시절의 외연을 넓혀나간다.
인도선교사를 꿈꾸던 팔방미인 최우등생
그는 별난 데 관심이 많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하는,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호주 선교사는 그에게 늘 좋은 멘토였다. 공덕귀는 유치원 조보모, 통영 진명여학교 야간 선생을 했다.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의 꿈은 인도 선교사였다.
21살의 늦은 나…
부산의 도시빈민선교사업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막을 내렸고, 서울에서 조선신학교 일을 볼 수도 없게 된 송창근은 1940년 초에 경북의 김천으로 옮겨갔다. 김천 황금정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김천은 경북의 한 중소도시이다. 옛날에 금이 나는 샘인 금지천(金之泉)이 있는 땅이라 해서 ‘김천(金泉)’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창근 목사가 이때 느닷없이 김천으로 간 계기는 황금정 교회의 강익형 장로와의 인연 때문이라고 한다. 강 장로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초빙했다.
강 장로는 본래 평남 덕천 사람인데 3.1운동으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었고, 그 후 일경의 압박과 감시가 심해서 이남으로 피신하여 처가쪽과 인연이 있는 김천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상업에 투신하여 해산물 도매업을 해서 크게 돈을 모았다. 그래서 평안도에 사는 친족 집안들도 대거 따라 내려와서 김천에 자리 잡았는데, 온 가문이 교회 일에 무척 열심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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